발왕산 천년주목숲길과 월정사 선재길을 걸으며

케이블카 타고 왕의 기운 받으러 가볼까

가을이 다 지나가고 있었지만 단풍놀이라니 어쩐지 시큰둥한 마음이었다. 문득 불안감에 사로잡힐 때면 밥알이 목구멍에 걸리는 듯 하지만 그럴수록 무기력함에 아무것도 할 수 가 없는 날이 많다. 술을 마시는 것처럼 망각의 행복은 순간이지만 뭐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으니 또 다시 집 밖을 나서본다. 콧구멍에 바람이라도 좀 쐬면 괜찮을거야. 

향한 곳은 평창이었다. 전국 팔도 중에서도 기운이 잘 맞아 무던 들락거리게 되는 강원도다. 고향도 아닌데 늘 그립다. 

여행은 인생처럼 언제나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동선대로라만 오대산을 먼저 들려야했는데 이후 일정이었던 발왕산에서 케이블카를 타려면 3시간씩 기다려야한다는 무시무시한 소문을 듣고 발왕산부터 들르게 되었다. 산을 탈 때에는 산에서 인생을 봤는데, 여행을 다니면서보니 길 위에도 인생이 있다.

발왕산은 8명의 왕이 날 기운이 있다 하여 원래 8왕산(八王山)이라 불렸다고 한다. 해발 1,458m로 높이가 꽤 되지만 케이블카로 정상까지 편하게 올라갈 수 있다. 탑승장에서 정상까지 왕복 7.4km로 동양 최장이라고 한다. 발왕산 케이블카 티켓은 성인 왕복 25,000원.

발왕산 관광케이블카

소문은 진짜였다. 내내 아닐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발왕산 관광케이블카는 정말로 3시간을 기다려서야 겨우 탑승할 수 있었다. 4시간은 안 걸렸으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이럴 줄 알았으면 새벽 3시에 출발할 것을 그랬어.

정상까지 약 20분 정도 소요되었다. 오르는 중에 백두대간의 산맥들을 감상할 수 있고 시야가 좋은 날에는 강릉 바다까지 보인다고 한다. 이 날은 날씨가 내 마음처럼 찌뿌둥해서 동해까지는 볼 수 없었다.

발왕산 관광케이블카

그래도 올라가니 참 좋았다. 백두대간의 산맥들이 굽이굽이 한 눈에 들어오니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모습

발왕산 스카워워크.

발왕산 스카이워크

케이블카를 타려고 기다리면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다보니 밥 때를 놓쳐 오대산 근처에 있는 성주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했던 계획은 간단히 무산되었다. 발왕산 정상에 있는 푸드코트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기로 하고 떡볶이, 순대, 어묵으로 구성된 세트메뉴를 주문했다. 평범한 분식이었지만 맛이 꽤 괜찮았다. 

이런 뷰를 보며 먹는 떡볶이라니, 떡볶이가 이렇게 사치스러울 일인가

발왕산은 고지가 높아 정상에는 고지대에서 자라는 주목 군락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나무데크가 마련되어 있어 숲길을 산책할 수 있다. 나무데크는 휠체어를 탄 사람도 이용할 수 있도록 완만한 경사로 만들어졌다.

산책로가 나무데크로 되어있어 걷기 편합니다.

이곳은 겨울이면 유난히 적설량이 많아 주목나무에 핀 상고대가 특히 아름답다고 한다.

주목 군락지

천년주목숲길을 따라 걷다보면 발왕수라는 약수터가 있다. 일회용 종이컵이 구비되어 있고 아예 떠가라고 옆에 생수병도 팔고 있었다.

발왕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솟아나는 천연 암반수로 발왕산 정상부의 눈이 스며들어 단단한 퇴적암과 상호작용하여 만들어진 물이다. 발왕산을 이루는 암석은 빗물의 풍화 침식에 강하여 지금의 높은 산을 이루었는데, 그 구성 성분이 물에 잘 녹아나지 않기 때문에 발왕수는 아주 맑은 물이 된다고 한다.

발왕수는 4곳에서 물이 나오는데 각각 재물, 장수, 지혜, 사랑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다.
 
산에서 나는 약수는 잘 마시지 않기 편이라 조금 망설여졌지만 다들 거리낌없이 마시기에 나도 조심스레 한모금 맛을 보았다. 발왕수는 나트륨 성분이 거의 없어서인지 싱거운 듯 하면서도 깨끗하고 순수한 맛이었다. 

지혜로워질까 싶어서 지혜의 물

한국 최고 수령인 1,800년의 역사를 가진 아버지 왕주목은 둘레만 4.5m에 달하는 거대한 고목인데 왕수리 부엉이가 둥지를 텄다. 왕수리 부엉이는 사냥한 먹이를 보관했다가 먹는 습관 때문에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로움과 부의 축적을 상징하고, 소중한 것을 지켜준다는 믿음으로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새라고 한다. 아버지라고 해서 이 주목이 발왕산에 주목 군락지를 만든 범인인가 생각했는데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ㅎㅎ

주목나무는 재질이 잘 썩지 않기 때문에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산다고 한다. 그리고 천년 이상을 산 나무는 혼이 깃든 산신(山神)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도 마음 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아버지 왕주목

어머니 왕주목은 둘레가 4.5m에 달하는 거대한 고목으로 수령이 2천년 가까이 된다. 몸통 가운데에 붉은 열매를 달고 삐죽 튀어나와있는 것은 마가목인데 이를 품고 있는 모습이 어머니를 닮아 어머니 왕주목이라고 불린다.

마가목을 품고 있는 어머니 왕주목

이 나무는 서울대학교 정문 모양인 '샤'를 닮아 서울대 나무라고 부른다. 이곳에서 시작하는 모든 것은 최고가 된다는 발왕산의 이름에 걸맞게 챔피언의 기운이 가득한 기원목인 참나무다.

학문과 명예의 기운이 담긴 기원목인 서울대 나무

케이블카는 내려올 때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발왕산 케이블카는 종일 일정으로 잡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침 일찍 도착했는데 내려오니 날이 어둑어둑 저물고 있었다. 


우울해도 단풍은 보고싶어 

오대산 선재길이 멀지않은 곳에 있어 해 지기 전에 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대산 선재길은 오대천을 따라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이어지는 9km의 길이의 길을 말한다. 오대산은 지혜와 깨달음을 상징하는 문수보살의 성지인데, 과거에는 스님들이 지혜와 깨달음을 얻고자 이 길을 걸었다고 한다. 선재(善財)는 <화엄경>의 선재동자에서 따왔는데, '참된 나'라는 뜻도 담겨 있다. 선재길 전구간을 걸으려면 편도로 약 3시간 소요된다. 월정사는 주차비나 문화재 관람료는 따로 징수하지 않았다.

주차장에서 월정사까지 걸어가는 길의 오른쪽으로는 물이 맑아 수달이 산다는 오대천이 흐르고 키가 큰 아름드리 나무들이 빽빽이 뻗어 있었다. 이 길은 월정사에서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인 일주문까지 조성되어 있는 월정사 전나무 숲길이다. 평균 수령 80년 이상의 전나무 1,800여 그루가 늘어서 있는 모습이 아름다워 한국의 3대 전나무 숲길로 꼽힌다. 

한국의 3대 전나무 숲길인 월정사 전나무 숲길

전나무 숲길은 약 900m 길이로 약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월정사와 선재길을 본 후 전나무 숲길을 걷는 것도 좋다.

오대산 전나무숲길 탐방로

월정사 입구에서부터 선재길을 따라 불이 붙은 듯 유난히 붉은 단풍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단풍 맛집이다. 

월정사 입구

단풍명소인 선재길

월정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천년 고찰이다. 사찰 내 고즈넉한 분위기에 이내 마음이 편안해진다.

월정사 전경

월정사에는 국보 제48호 월장사팔각구층석탑도 있다. 이 석탑은 고려초기 석탑을 대표하는 다각다층석탑으로 석탑 앞에는 공양하는 모습의 석조 보살이 마주보고 앉아있고, 지붕돌 위에 금동으로 된 머리장식이 그 오랜 세월동안에도 거의 소실되지 않고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괜히 국보가 아니다. 믿고보는 국보다.

아름다웠던 국보제48호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올 가을의 끝자락은 강원도에서 지나갔다. 손 끝이 보라빛인 걸 보니 어느새 겨울이 성큼 가까워지고 있는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