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문외과를 방문하다
약 4개월 전 갑자기 항문이 가렵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회충에 감염된 줄 알고 회충약을 복용했어요. 확실하게 박멸하려면 1정 복용 후 1주일 후 1정을 복용하면 된다고 해서 2정이 들어있는 구충제를 구입해서 1주일 간격으로 2정을 복용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가렵더군요. 회충 감염은 밤에 회충이 알을 낳기 때문에 밤에 가렵다는데 저는 시도 때도 없이 가려웠습니다.
그렇게 보름 즈음 지났을까요? 항문 근처에 혹같은 것이 만져지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치질에 대해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제 증상은 회충 감염이 아니라 치질인 것 같았어요. 저는 실비에 가입을 하지 않은 상태였고 치질 수술이 너무 고통스럽다는 말이 많아서 병원을 가지 않으려고 처음에는 치질의 자연치유에 대해 검색을 많이 했습니다. 온수좌욕으로 튀어나온 치핵이 다시 쑥 들어가 자연 치유했다는 사람도 있어서 저도 근 4달간 그렇게 좌욕을 열심히 했답니다.
참고로 온수좌욕은 보존적 치료방법으로 증상을 완화시키거나 더 악화되지 않도록 지연시키는 방법일 뿐 보존적이라는 말의 의미처럼 원래의 예쁜 *로 되돌려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치핵은 혈관이 변성된 것인데 한번 변성된 조직은 온수좌욕으로 혈액순환을 도와준다고 원래의 멀쩡한 피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자연치유했다는 후기는 모두 대가를 받고 관련 제품을 광고하는 포스팅이었어요.
다른 것보다 미칠 것 같은 항문소양증으로 삶의 질이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삶의 질이 떨어진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처음 깨달았습니다. 우선 가려움만이라도 어떻게 해보자 싶어 지르텍을 복용하면서 버텼습니다. 참고로 지르텍은 특허 종료로 동일 성분의 카피약들이 많이 나와있고 훨씬 저렴하니 그걸로 구입해서 드세요. 지르텍은 4500원인데 노텍이나 세티스와 같은 카피약은 고작 2천 원이고 먹어보니 효과는 똑같습니다. 항문소양증으로 병원에 내방한다고 해도 처방해주는 약은 크게 다르지 않으니 특별한 이유 없이 항문이 가렵다면 그냥 약국에서 세티리진염산염 사다가 드시면 됩니다.
세티리진 염산염이 가려움증에는 효과가 참 좋았습니다. 그러나 점점 옅은 악취가 나는 분비물이 속옷에 묻어 나올 정도로 많아지고 항문 주변 피부가 짓무르는지 빨갛게 붓고 따갑기 시작하더라고요.분비물 때문인지 요도염과 질염까지 비뇨기 상태가 전반적으로 안 좋아지고 가려움으로 밤에 잠도 푹 잘 수 없고 똑바로 누우면 불편해서 항상 옆으로 누워잤습니다. 분비물이 있어서 치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치루에 걸리면 분비물도 많고 수술해서 고름을 빼내고 나면 엉덩이 속에 계란만 한 구멍이 뚫리기도 한다던데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도 없고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마음고생도 엄청 했답니다.
3도 복합치핵 진단
그렇게 근심 걱정과 고통 속에 4개월을 근근이 보내고 나서야 겨우 치료를 결심할 수 있었습니다.
"아.. 수술해야겠구나..."
병원에 가기 전 먼저 실비를 가입했습니다. 일단 진단을 받고 진료기록이 남으면 항문부위 부담보로 가입하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에 저처럼 실비가 없으신 분은 먼저 가입부터 하고 병원 방문하세요.
실비를 가입하실 때에는 생명보험보다 손해보험을 드세요. 생명보험은 사망 시의 보장(종신) 중심으로 정액보상 위주이므로 보험료가 상대적으로 높고 보장 범위가 다소 제한적인데 반해, 손해보험은 치료비인 생존보장 중심이며 실손보상 위주로 보험료 부담이 상대적으로 낮고 보장 범위가 넓어 실생활에서 의료비를 청구할 때에는 손해보험이 훨씬 도움이 됩니다. ~화재, ~해상, ~손보로 끝나는 것들이 손해보험이에요. 치질은 따로 면책기간이 없기 때문에 가입한 첫날부터 바로 보상이 가능합니다. 저는 병원 방문하기 3일 전에 가입했는데 바로 보상받을 수 있었습니다.
착잡한 마음으로 항문외과에 방문했습니다. 가뜩이나 마음고생이 심한데 남의사한테 똥꼬를 까는 수치심까지 견디기는 싫어서 조금 비싸더라도 여의사 항문외과를 찾아서 방문했고, 상담하고 내시경으로 항문 속을 검사한 후에 3도 복합 치핵(내치핵+외치핵) 판정받았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치루 소견은 없어서 불편하지 않으면 수술하지않고 항히스타민제 먹으면서 버텨도 되는데 병원에서 처방해주는 약도 지르텍과 다르지 않다고 하더군요. 저는 이미 멘탈이 바스러질 때까지 버티다 온 것이기 때문에 이 날 바로 수술 예약을 잡았답니다.
수술하기 전에 피검사, 심전도 검사 등 간단한 검사비용이 추가되어서 27,700원을 결제했습니다. 맨날 욕하면서 어쩔 수 없이 내는 건강보험이 생각보다 많이 적용되더라고요. 실비는 급여 부분에서 본인부담금의 80-90% 정도 보상되는데 저는 17,700원을 보상받았답니다. 수술 전 검사는 3개월까지 유효하니 검사했다고 바로 수술할 필요는 없어요.
입원 준비
사실 변을 볼 때 뭐가 튀어나왔다가 들어간다거나 아프거나 피가 난다거나 하는 건 없어서 외치핵 초기라고 생각했는데 3도 복합 치핵 판정을 받은 것은 충격적이었습니다. 3도 치핵부터는 수술치료가 꼭 필요하니 여러분, 진단은 스스로 하지 마시고 의사에게 맡기세요..
정말 수술만은 피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수술 예약을 하고 입원 준비를 하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건강에는 자신 있었기 때문에 실비도 들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살다가 이렇게 예기치 못한 순간에 급작스럽게 이보다 더한 병에도 걸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죽음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까지 작성하고 왔다면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짐작하실까요?
병원 따라 1박 2일 입원하는 곳도 있는데 제가 간 병원은 2박 3일 입원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해보니 수술은 짧고 간단하지만 사후 통증이 극심하기 때문에 입원기간이 긴 것 같습니다. 입원은 가능하면 오래 하시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수술 전 관장을 하고 금식시키는 병원도 있는데 저는 관장은 안 했고 수술 당일 식사하고 방문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관장을 하면 똥이 만들어지는데 시간이 걸리고 그러면 수술부위가 협착될 수도 있기 때문에 관장은 하지 않고 수술 후에도 되도록 굵은 변을 봐야 좋다고 하더군요.
저는 좌욕할 수는 없는 곳이라 물티슈, 속옷, 세면도구, 물통, 3일 치 마스크, 핸드폰 충전기를 챙겨갔어요. 수술하면 거즈를 데고 있어도 피와 진물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여분의 속옷은 넉넉히 준비하세요. 사진에는 없지만 수면양말도 챙겨가시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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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질수술 입원 준비물 |
치질 수술 당일
수술 당일착잡한 마음으로 병원에 도착해서 치질 수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입원약정서와 통증치료 신청서에 사인을 했습니다.
팔에 링거를 꽂는데 혈관이 얇아서 첫 번째는 실패하고 손목에다 꽂았네요. 손목에 꽂으니 왼손은 아예 쓸 수가 없어서 2박 3일 내내 화장실 갈 때나 세수할 때나 밥 먹을 때 모두 많이 불편했습니다. 팔뚝에 꽂으시면 행운이에요.
팔에 동그라미 친 부분은 항생제 테스트한 것인데 이게 정말로 아팠습니다. 항생제 주사는 입원 내내 수시로 맞는데 계속 맞으니까 멍도 들고 어떤 때는 수술부위보다 엉덩이 주사 맞은 곳이 더 욱신거리고 아프더라고요.
잠시 기다리다가 수술실에 들어갔습니다. 병원마다 의사 선생님 스타일에 따라 환자를 수술할 때 다리를 벌리게 하는 경우도 있고 엉덩이를 높게 들게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좀 수치스럽잖아요. 저는 바지도 완전히 탈의 안 하고 엉덩이만 살짝 내리고, 그냥 다리를 모아 엎드려 반듯하게 누운 채로 했습니다.
수술은 치핵 근본 절제술로 했고, 척추마취로 하반신만 마취하고 하는데 엉덩이 위 등뼈에 주사를 꽂고 마취액을 넣어요. 척추마취주사는 안 아프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견딜 수 있는 통증이고 맞고 나면 다리가 따뜻해지는 느낌이 나면서 금방 마취가 되어요. 수술은 15-20분 정도 짧게 끝났고 정말 하나도 안 아팠습니다. 다만 수술부위를 물리적으로 누르거나 하는 건 다 느껴지고 소리도 들리고 레이저로 지질 때 타는 냄새도 납니다. 간호사가 음악을 튼 이어폰을 씌어줘서 그 소리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심리적으로 공포가 대단해서 온 몸이 벌벌 떨렸어요. 다 끝나고 나서 떼어낸 치핵 덩어리를 보여주는데 엄지손톱 만한 것들이 몇 개나 있었습니다. 다신 보지 말자..
치질 수술 아프지 않다고 하는 글들이 있는데 수술은 정말 하나도 안 아파요. 그건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치질 수술은 수술 후가 백만배 고통스러운 수술이예요.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들 것에 실려 입원실로 이동했습니다.
👉🏻 다음 편에서 계속...